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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기독교 정신 1편

by 예그랑TV 2023.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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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기독교 정신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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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 기념해이다. 3.1운동은 단지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민족적 저항의 날만이 아니라 이 독립만세 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전 국민들의 저항 정신이 한데로 모아져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생겨나게 되었고, 여기서 대한제국을 다시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창립하게된 것이다. 다시는 황제가 중심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창립하겠다고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그 정신이 계승되어 독립운동이 지속되었고, 일제가 패망하자 대한민국이 1948년 새로운 국가로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3.1운동은 기독교와 분리해서 생각될 수 없다. 3.1운동이란 일제 식민지로부터 독립운동으로 1910년 당시의 군국주의 일본에 반항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대한제국의 국무위원들이 일본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군사권과 외교권을 빼앗긴 후 형식적으로 남은 국가의 권력까지 일본에 문서적으로 넘겼다. 5백년 지속된 조선(朝鮮)이 한일한방 조약에 의하여 일본에 국가의 옥쇄를 넘긴 것이다. 그래서 1911년 동아시아를 여행한 영국의 페이비언사회주의(Fabian Socialism) 신봉자 비어트리스 웹(Beatrice Webb, 1858~1943)은 한국인을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비천한 척추동물"로 멸시했다.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지 않고 사회복지의 도구로 본 그에게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넘겨준 한국인은 독립정신이 없는 미개인으로 비쳤던 것이다.

1. 대한제국의 무능

당시 대한제국(大韓帝國, Korean Empire, 1897-1910)은 무너져가는 조선(朝鮮)이 1897년 제국선언으로 이름만 바꾼 것이다. 제국이 될만한 군사, 재정의 능력이 없었다. 고종은 선언적으로는 황제가 되었으나 황제에 걸맞는 힘이 없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청나라의 국력이 다하고, 일본이 개화로 군사대국이 된 것도 파악하지 못한 채 19세기의 서구 열강의 식민지주의에 아무런 대항할 힘이 없었다. 관리들은 탐관오리로 가난한 서민들을 착취하고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조선(朝鮮) 헌종 때인 1845년부터 22년간 포교하다 순교한 다블뤼 주교가 파리 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조선의 양반들은 평민에게 지독한 폭정을 가한다. 평민을 착취, 약탈, 불법 구금한다.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다"고 썼다. 대한제국은 국호를 황제의 나라라고 선포했으나 이를 뒷받침해줄 국력이 없었다. 군대도 없었고, 경제력도 없었다. 당시 서양 선교사에 조선의 집이란 짐승이 사는 움막처럼 보였다. 당시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만주일대를 손아귀에 넣었고, 1905년 로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朝鮮)에 대한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이러한 19세기 말의 식민주의 시대에 조선은 국호만 대한제국이었으나 황제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2.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의 창립

1910년 한일합방하고 10년이 지나면서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국민으로 일제로부터 각종 억압과 천대를 받았다. 조선의 전통 종교인 불교와 유교가 진공상태로 일본 식민지 정책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갖지 못하게 할 때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자유롭게 지음을 받았다는 자유와 평등사상을 고취시켜주었다. 그리고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바로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는 독립정신을 점화시켜주었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인은 국가와 민족의식이 깨어있는 민족임을 입증했다. 양반, 상놈, 천대받는 기생까지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망국이 다 나의 책임이라고 고백한 민족적 고해성사였다. 한국이라는 나라와 국민이 없어진 데서 살아난 날이었다. 국가의 주권이란 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선언하면서 3.1운동은 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나라는 더 이상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아니라 국민이 중심이 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3. 조선 및 역대 정부의 숭중(崇中) 사대(事大) 주의

조선(朝鮮)의 왕들은 정월 초하룻날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치렀다. 대궐에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신 뒤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군신(君臣)의 예를 갖춘 것이다. 1898년 폐지될 때까지 거른 적이 없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는 성안으로 쫓겨들어간 인조가 명(明) 황제에게 바치는 망궐례 모습이 나온다. 청나라 군대가 성을 포위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인조는 세자와 함께 곤룡포를 휘날리며 춤추고 노래 부른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치욕과 무력감이 극에 달하는 장면이다. 조선왕들은 명나라를 숭배하는 사대주의 때문에 청나라 군대에 의하여 굴욕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숭중사대(崇中事大)주의는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공산당 창건일을 축하하였고,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중국 방문 때 "한국과 중국은 운명 공동체" "한국은 작은 나라, 중국은 큰 봉우리"라고 했다. 노골적 친중 선언이었다. '3불 약속'은 안보 문제를 중국이 정해주는 대로 따르겠다는 자발적 굴욕이었다. 중국 경비함들이 오늘날 서해 백령도 앞바다까지 드나들어도 항의 한번 못 한다. 대통령부터 이러니 집권 세력 전체가 공산 중국에 굴종하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생체 정보로 인권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디지털 파시즘(digital fascism)으로 신장 위구르, 티베트, 홍콩 주민들을 압제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초대형 군사 궐기에 대하여 미국·일본·호주·인도의 4각 협력체(Quad)라는 새로운 연합체를 만드는데 한국은 한미동맹으로 이에 당연히 참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중국 눈치를 보고 이에서 스스로 소외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정치지도자가 시대상황을 제대로 보지못하는 어리석은 외교적 처신이다.

 

 

https://youtu.be/-lZ9bmVvd9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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